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I see you


 아바타를 보고 나서 제일 먼저 생각나는 말은 짧은 그 한마디 "I see you." 다.
 I see you라는 대사가 왜 그렇게 강렬한지 어찌보면 단순하게 느껴질수도 있는 "난 당신을 바라봅니다." 라는 이 대사가 엔딩 타이틀곡의 제목까지 맡았는지 왜 머리끝에 돋아난 촉수로 동식물들과 교감이 가능한 나비족들이 왜 눈으로 대상을 바라보면 이러한 대사를 말하는지에 대해서 아바타의 엔딩 타이틀곡의 제목인 ' I see you.' 의 의미에 대해 파고들어 보았다.


난 당신을 봅니다.

 이 말에 함축된 여러가지 뜻들이 있는데 단순히 세가지로 나누어 본다면
1. 누군가를 본다는건 그 사물자체를 본다는것과
2. 그 사물을 관통하는 사람의 인격과 성품까지 본다는것
3. 그리고 그것을 통합한 그 대상 자체를 본다는것이다.

 군복무한 시절에 국방부의 시계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며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읽었었던 많은 책들 가운데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책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라는 책의 도입 부분에 이러한 말들이 있다. 사람의 눈으로 누군가를 본다는것 이러한 본다는것에 치우쳐 나무만 바라보며 숲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 누군가를 본다는것은 그 대상에 겉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을 관통하는것을 본다는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바로 eyes가 keen을 만나서 날카로운 눈이 되는것 단순히 누군가를 보는것 이상의 관통하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는 이러한 의미에 대해서 책은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데 그 만큼 누군가를 본다는것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통하는 시야를 단순히 그림으로 본다면
  아래에 있는 그림과 같은 시야 바로 Keeneyes인 것이다. 비단 날카로운 눈이 아닌 그 대상을 꿰뚫어보는 시야 그것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는 점 인것이다. 이러한 시야를 가지지 못한 이들은 한 대상의 한쪽 부분만을 바라보며 살기도 하는데 이러한 시야는 결국 자신이 가진 시야 이상의 것들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사는 같은 눈을 가지고도 그 만큼밖에 볼수없는 이들의 시야이며 이러한 시야는 경영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가져야할 시야인 것을 말한다.
 아무튼 이러한 인문학 관련 서적에서 나온 관통하는 시야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아바타에서의 "I see you." 라는 이 말이 어떠한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이제 쉽게 이해할 것 이다. 이제 아바타의 영화속 장면을 살펴보면 제이크와 네이티리는 서로에게 처음부터 I see you라는 대사를 말하지 않았다. 처음 이 말을 말한 네이티리의 행동을 살펴보면 네이티리가 제이크를 볼때 그녀는 제이크에 겉모습만 보고 그를 평가하지도 않는다.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나무의 씨앗이 그를 선택한 자라고 해석할때도 그를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저 네이티리는 차분하게 제이크를 바라보며 그에게 나비족을 설득해야하는 제이크의 입장을 알지도 못한채 그저 그에게 기회를 제공해달라고 말하고. 옆에서 제이크의 성장을 바라보고 함께하면서야 제이크의 (나비족과 인간의 합성 유전자로 움직이는)아바타가 아닌 아바타안에 담겨있는 그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렸을때 그녀는 그제서야 I see you라는 단어를 말한다. 이러한 장면을 보며 자소서와 이력서라는 종이쪼가리로 '나'라는 인간을 대변해야하는 참으로 영화보다 못한 현실에 더욱 슬펐을 이 땅의 많은 취업준비생의 모습을 바라보는것 같았다.

 아무튼 우리는 누군가를 바라보며 누군가의 시선을 받고 살아간다. 어떤 이들은 비디오 카메라나 카메라로 누군가를 도촬하려는 이들도 있고 누군가의 시선과 이러한 도촬을 받기위해 어떻게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는, 이리도 메롱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단순히 본다는 이러한 단순한 의미를 제임스 카메론은 다시금 관객들에게 환기를 시켜줌으로써 눈이 있는 사람만 누군가를 본다는것이 아닌 한 대상이 다른 대상을 느끼고 그 대상을 알아간다는 이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뜻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가 단순히 여러가지 SF장르와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나왔었던 스토리와 세계관등 다양한 비슷한 볼거리들이 그것들과 비슷함을 이유로 아류작이라고 폄하되는건 옳지 않다고 본다.

아무튼 I see you.




폭력의 역사 Ⅱ

비고 모르텐슨의 Eastern Promises, 2007
 데이빗 크로넨 버그는 전작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로 부족했는지 비고 모르텐슨 그리고 나오미 왓츠와 함께 이스턴 프라미스라는 21세기의 대부라는 평을 듣는 거대한 작품을 들고 나왔다.
 영화를 바라보면 전작인 폭력의 역사가  미국이라는 거대한 경찰국가안에서 한가정을 통해 보여줄수도 있는 폭력의 순환에 대한 정의를 세워줬다면, 이스턴 프라미스 또한 영화속 - 소녀의 매말라버린 나레이션처럼 - 건조한 시선으로 전작과 같이 폭력과 현실의 경계점을 너무나 쉽게 무너뜨려 보여준다.
 전작이 '폭력의 순환' 그 자체를 보여주었다면 두번째 작품은 폭력의 중단 점인 결코 끝은 아닌 지점. 한명의 언더커버의 슬픈 표정과 함께 결코 끝나지 않을것 같고 끝나지 않았지만 그 지긋지긋한 폭력의 순환의 쉼표가 될수있는 중간지점을 비춰준다.
 하지만 그 쉼표도 러시아의 뼈속깊이 파고드는 바람처럼 너무나 차갑고 서늘할뿐이다.

2009년 12월 27일 일요일

글쓰기의 영도(零度) - 진중권

2009 12 27

 

글쓰기의 영도(零度)

 

진중권/ 문화평론

씨네21 555

 

프란시스 베이컨의 작품 중에 입을 통해서 모든 것을 쏟아내다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그림이 있다. 뱃멀미를 하는 사람들이 토하고 토하다가 토해낼 없어 괴로워하는 것처럼, 쟁이도 요동하는 현실 앞에서 느끼는 현기증과 역겨움에 글을 토하고 토하다가 토해낼 없어 괴로울 때가 있다. 그때는 입으로 신체 안의 모든 기관을 토해냐고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진다.

본의 아니게 논객 노릇을 지도 거의 10년이 되어간다.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일인데, 이제는 그게 아예 정체성이 되어버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토해놓을 지면을 갖고 있다는 어찌보면 특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면을 채우려면 세상의 거의 모든 일에 '견해' 가져야 하다. 그것만큼 피곤한 일도 없다. 때로는 아무 견해없이 그냥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며 살고 싶어진다.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언급하다보면 나중에는 아직 언급하지 않은 주제를 찾기 힘들어진다. 똑같은 글을 소재만 바꿔 고쳐쓰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 언젠가는 동일한 글쓰기가 반복되는 지루한 동일자의 무한증식 상태에 빠져들게 된다. 세상이 제아무리 다양하다 하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솔로몬의 격언처럼 세상이라는 것만큼 동일한 일이 지겹게 반복되는 지루한 드라마도 없다.

하루라도 미디어에 노출되지 않으면 견디는 이도 있다고 하나, 사실 미디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마냥 즐겁기만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피부의 두께가 다르듯이, 사람마다 자신이 견딜 있는 한도 이상으로 미디어에 노출될 존재 역시 화상을 입어 상처에 물파스를 바른 듯한 고통을 온몸으로 느껴야 한다.

논객은 글을 칼처럼 사용한다. 그러다보면 온몸으로 적대자들이 휘두르는 보복의 칼집을 받아야 한다. 비난도 적당히 받으면 기분이 나쁘지만, 과도하게 받으면무감해지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엔 비난을 받는 자체가 쾌감으로 바뀌어버린다. "내가 비난을 받는 것은 뭔가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했다는 증거다." 증상이 이쯤 되면 하루라도 욕을 먹으면 혀에 가시가 돋는 변태가 된다.

논객의 발언은 기술적(descriptive) 아니라, 규범적(normative)이다. 윤리학에 '공약의 부담'이라는 있어, 규범적 발언을 하는 이는 말을 지킬 책임을 먼저 자신에게 지워야 한다. "약속을 적게 할수록 많이 지킬 있다" 과학의 윤리는 동시에 논객의 윤리, 하지만 논객은 과학자보다 불행하여 글을 때마다 약속을 해야 한다. 말과 글을 쏟아낼수록 글쟁이는 말로 몸을 옭아매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숨이 막히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흔히 독자는 글을 보고 필자의 인격을 추정한다. 하지만 글을 쓰는 인간과 삶을 사는 인간은 다르다. 글쓸 때의 인간은 '이상적 주체' 되지만, 원고료를 챙기는 글쟁이는 지극히 '현실적인 주체'(종종 글쓴이를 직접 보고 나서 독자들이 글에서 얻은 아우라가 무너지는 체험을 하는 때문이다). 글쟁이는 자신의 비루한 현실과 글을 때에 연기하는 이상의 괴리에 역겨움을 느끼다가 결국 자신을 혐오하게 된다. 바로 이때가 더이상 글을 쓰는 불가능해지는 글쓰기의 영도(零度). 지금 제로 디그리에와 있다. 그동안 이곳저곳에 없이 많은 말과 글을 뿌리며 살아왔다. 있는 모든 말들을 토해놓고, 토할 없어 위산까지 토해놓고, 그것도 모자라 안의 기관을 증발시켜 스프레이처럼 입으로 뿜어내어 마침내 존재를 허공으로 날려버린 느낌이다.

이것이 내가 지면을 개인적 넋두리로 장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씨네21> 독자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이제는 규범을 말하고 지키는 논객이 아니라, 그냥 사실을 기술하는 기록자나 허구를 늘어놓는 이야기꾼이고 싶다.

 

2009년 12월 21일 월요일

아바타 - 판도라를 창조하다.


신은 세상을 창조했다.

하지만 진화론과 함께 신이야말로 창조된 것이란걸 알고있다.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세계는 창조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어떤 이의 머리속에서도 세계는 창조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한다.

그런데 카메론은 창조된 세계를 판도라라는 행성 그리고 그 속에서 발버둥치는

생명체들과 이미 창조된 가까운 미래의 지구에서 온 지구인들과 함께 단지 우리 눈에 보여준다.


비쥬얼의 혁명...실사와 비실사의 구분

그 전의 영화에서도 이러한 화면은 많이 보여주었다.

그런데 카메론은 말 대신 162분간 판도라라는 행성에서의 모험으로 우리를 초대할뿐이다.

내가 극장에 있는지 판도라에 있는지 구분할수 있는건 비쥬얼로 감출수 없는 소소한 오류들뿐

다시금 판도라에 잠수한 난 엔딩 스크롤이 올라갈때에서야 이곳이 극장인지 다시 인지할수 있었다.

I see you.

업타운걸스


브리트니 머피의 부고를 듣자마자 업타운걸스 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다코다 패닝과 함께 연기를 펼치는데

한때 텅빈 나 자신만큼 방전된 몰리를 연기한 브리트니 머피를 보며 여배우가 보여줄수있는 어떤 아우라를 느꼈던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이 맡은 역활에 항상 무엇인가 알수없는 매력까지 더해주었고

클루리스부터 8마일 그리고 나에게는 업타운걸스로 각인된 그녀는

흘러간 시간과 함께 성장한 진짜 배우였다...

2009년 12월 17일 목요일

국진이 형님이 언급한 파이날 디씨전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이널 디씨전  Exevutive Decision, 1996


 몇일전 티비를 보는 중 재방송되고 있는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개그맨 김국진 형님이 최근에 본 영화가 무어냐 라는 질문에 파이널 디씨전이라 대답한다. 그래서 찾아보게 되었다.
 파이널 디씨전(원제: Exevutive Decision, 1996) 무려 13년전에 제작된 영화다. 이걸 가장 최근에 본 영화라고 말하는건 아직 형님이 -_-;홀로 계신다는걸 말씀해주신다. 아무튼 쌍팔년도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영화지만 실제 영화를 보면 그런 말들을 싹 다물게 할 정도로 당시 최고의 캐스팅(스티븐 시걸, 커트러셀, 할리베리등)과 그와 어우러지는 스토리라인으로 짜여진 132분의 숨막히는 영상을 보노라면 당시 액션무비가 차지하는 시장의 크기를 짐작할수 있다.

 스토리를 간략히 보면 영화는 스티븐 시걸 형님의 맞춤식 목꺽이로 상쾌한 출발을 한다. 이윽고 9.11테러를 예견한듯한 중동국가 테러리스트에 의한 비행기 하이잭킹을 보여주며 급박한 상황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영화의 도입부 친절하게 커트러셀의 경비행기 연습과 강사의 극찬을 보여줌으로 진정한 복선이란 이런것이다. 감독을 보여줌으로 시청자들의 똥꼬를 다소 풀어지게 해준다 이윽고 투입되는 스티븐 시걸 형님과 커트러셀 하지만 어이없게 시걸 형님이 작전 중 사망 하시고, 여기서 모든 이들을 실망하게 할것이라고 생각한 감독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시걸 형님의 작전 중 사망에도 영화는 긴장의 끈을 놓지않고 어처구니없는 빨대 테크닉과 경비행기 조정=보잉 747조정 등 말이 안되는 장면들도 말이되게 하는 액션과 스토리로 보여주며 흥미진진하게 이어나가며 킬링 타임용 액션 무비는 이런것이다. 라는걸 13년이 지난 오늘날 비(레인)씨의 닌자 영화에게 말해주는것 같다.

권총 헬리 펑

 사진과 같이 이렇게 시원한 시걸형님의 액션은 초반의 작전 중 사망 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볼수는 없지만 영화의 포스터를 균형있게 잡아주시는 시걸형님의 포스만으로 본인은 만족해야만 했다.

남성 그리고 폭력의 역사

폭력의 역사 A History of Violence, 2005

 












 처음 영화가 개봉되었을때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고 개봉 한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이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군대에서의 총기사고등을 통해서 이러한 미국적인 총기로 인한 폭력에 대한 학습을 이미 마친 상태였다. 그 이후 이 영화를 통해서 나는 영화를 보기 전 우습게 생각되던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에 대해 감탄할수밖에 없었다. 폭력이란것이 어떻게 전이되고 다시금 재생산되는가 이러한 폭력을 끊을수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러한 고민속에서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않던 나의 폭력에 대한 정의를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은 한 가정을 통해서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주었던 영화였다. 이러한 감상으로 본 영화를 다시금 여성의 입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을때 어떠한 느낌을 가질수 있는가... 이 영화를 처음 본 시점인 2007년도부터 2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다시금 이영화를 보았던 감상문을 써보자면.
  페미니즘이라는 시각이전에 이 영화에서의 여성의 한계점을 이 영화는 각각의 장면으로서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톰의 부인으로 열연한 마리아 벨로(에디 스톨)는 '코요테 어글리'라는 영화에서 술집주인역으로 여장부 이미지를 각인시켰음에도 이 영화에서는 너무나 무기력하게 폭력에 굴복하고 저항할 의지도 갖지 못하는 약한 여성으로 나오는데, 이는 영화의 줄거리를 위해서였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에도 쉽게 적응해야만 하는 여성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남편에게서조차 강간과 같은 성관계를 갖는 모습을 통해서 폭력에 노출된 여성이 얼마나 나약하고 힘없이 폭력에 굴복할수밖에 없다는 현실과 영화가 아닌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서도 이와같이 일어나는 연쇄강간 사건의 피의자가 경찰에 잡혀서 죄를 진술하면서 몇 백명이나 강간을 하고 다념음에도 피해자로 나선 여성들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는 뉴스 기사와 오버랩되면서 현실속 여성들이 영화에서의 톰의 부인처럼 이러한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됐을때 나약한지를 한계점으로 영화는 보여준다.
  남자는 학교나 가정 혹은 여러곳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그 폭력 그 자체에 대한 정의와 이해를 자기 자신이 할수있는 구조를 지닌게 우리나라의 현실이지만 여성에게 이러한 폭력들은 절대 노출되지 말아야할것 절대 정면으로 받아들일수없는 절대 회피라는 명제만을 가지고 있는것으로 인식되는게 바로 우리사회의 폭력의 정의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이 언제 어디서나 갑작스럽게 일어날수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폭력의 역사를 가정에 빗대어 설명함으로서 보여주게 된다.

  나 또한 여동생이 이러한 폭력에 대해 너무나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모습을 본 후에나 내 생각이 짧았음을 알수 있었던 기억이 있다. 여동생이 학교에서 일어난 남자 담임 선생에 의해 같은 반 친구에게 행한 구타장면을 반에서 약 10분동안 목격하고 그 구타가 끝나고 나서야 집에 전화를 해서 같은반 친구들의 온 가족들이 학교로 출동하는 사태가 벌어지는걸 보고 나서야 내가 남자라고 해서 이러한 폭력에 대한 고통이 나에게서만 일어나는게 아니라 가족들을 통해서도 고통을 받을수 있음을 몸소 느낀적이 있었다.

 사람은 어떠한 폭력이라는 것에서의 노출을 피할수없고 비단 티비와 영화에서 보여지는 폭력, 아바타로 가상의 게임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같이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폭력에 노출되있고 이러한 노출된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나라의 여성들에게 주입되는 폭력에 대한 극단적인 회피적 교육만으로는 이러한 폭력에 대응할수없는 무력한 여성만을 남기게 해준다는걸 우리는 간접적으로 느낄수있게 해주는 영화였다.

2009년 12월 15일 화요일

영화 그리고 cine21


씨네21
cine21
이라 불리는 잡지가 있다.

 1995년 고급영상 주간지 라는 이름과 함께 발매된 씨네21은 매주 월요일과 함께 가판대에서 볼수있는 국내 영화 주간지의 아버지이다.
 
 이 잡지는 우리나라의 영화계이며 산 증인으로 매주 나를 반겨준다. 가격은 3천냥! 중학생 시절에는 멋 모르고 샀고 고등학생 때는 점심값 한끼 아끼는 셈으로 샀다. 주머니가 어려울때는 한주정도 걸러서 안산적도 있다. 하지만 재작년부터 나는 이 잡지를 한 주도 놓지 못 하게 됐다.
 매주 새로운 영화가 개봉되고 기억속에서 사라지고 인터넷으로 무수한 정보가 파도처럼 밀려오고 밀려나갈때 씨네21은 항상 우리나라 영화계 어려울때나 한때 한국 영화계가 크게 커졌을때도 항상 정확한 시야와 사회상을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에게 보여주었고 가르쳐 주었다. 그런 잡지를 어찌 매주 나온다는 주간지로 생각하랴 나에게는 인생의 스승처럼 한줄기 빛을 비춰주는데 말야~

스크린 쿼터에 대한 논란으로 영화계가 갈릴때 디워에 대한 무조건적인 찬양속에서 씨네는 나에게 무엇이 옳은가보다 무엇이 무엇이다라는 낚시법을 알려주는 강태공이었기에 나는 이번주도 씨네21을 사본다.